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요제이 덴노 (문단 편집) == 기타 == [[유학]]과 [[국학]]에 매우 능해서 《[[겐지모노가타리]]》, 《이세모노가타리》, 《구간쇼》를 지었다고 하며 《[[일본서기]]》를 게이초칙판으로 발행하기도 했다. [[도요토미 히데츠구]]가 참혹하게 죽은 후에, 히데츠구의 어머니를 위로하고자 '즈이류인'(瑞龍院, 서룡원)이란 원호를 내렸으므로 히데츠구와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던 듯하다.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고요제이 칙서.png|width=100%]]}}}|| '''[[임진왜란]]이 일어났던 당시의 덴노이기도 하다'''. 그래서 일본에선 임진왜란/정유재란을 덴노의 연호를 따서 각각 '''분로쿠의 역'''(문록의 역, 文禄の役), '''게이초의 역'''(경장의 역, 慶長の役)이라고 부른다. '''정작 덴노 본인은 히데요시에게 조선으로 건너가지 말 것을 당부하는 서신을 보냈는데, [[허수아비|씹혔다(...).]]'''[* 그러나 이런 전적에도 불구하고 제국 시기의 일본은 히데요시가 고요제이 덴노를 수호했다며 빨아주었다.] 이 어명을 담은 친필 문서 원본이 [[교토국립박물관]]에 남아 있다.[[http://emuseum.nich.go.jp/detail?langId=ko&webView=null&content_base_id=101050&content_part_id=000&content_pict_id=000|#]] 《사명대사전》에서는 풍신수길을 앞세워 조선을 침공했다며 사명대사에게 농락당하는 신세로 나온다. 조선의 민간인들은 일본도 조선처럼 군주가 실권을 쥔 나라인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그려진 잘못된 묘사였다.[* 다만 조선 조정에서는 천황이 허수아비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. 《조선왕조실록》의 왕과 신하들의 회의를 보면 일본 천황은 수백년째 허수아비이고, 실권은 쇼군이나 칸파쿠(관백) 등의 신하가 쥐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. 그런 사정을 잘 모르는 민간인이 쓴 소설에서나 오해한 것이다.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민간인 출신으로서 권력을 잡은 히데요시 역시도 비슷한 오류를 저지른 바 있다.] 오히려 고요제이 덴노는 임진왜란을 반대하는 인물이었다. [[분류:천황]][[분류:일본 상황]][[분류:1571년 출생]][[분류:1617년 사망]][[분류:교토시 출신 인물]][[분류:센고쿠 시대/인물]][[분류:개명한 인물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